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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유래
삼척심씨(三陟沈氏)의 시조(始祖)는 고려조(高麗朝)의 심동로(沈東老)이다.
본명(本名)인 휘(諱)는 한(漢)이며, 호는 ‘신재(信齋)’이라 ‘신재공(信齋公)’으로도 불리기도 하다. 고려 충선왕 2년(1310) 경술년에 출생, 소년시절부터 글을 잘 지어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고려 충선왕부터 공민왕에 걸쳐 활동하였다.

충혜왕 2년(1342)에 생진과(生進科) 2등으로 합격(合格), 같은 해 가을에 병과(丙科) 1등으로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직한림원사(直翰林院事) 판성균관학록(判成均館學祿)이 되었다.

충목왕 원년(1345) 4월에 판예문검열(判藝文檢閱)이 되었으며, 2년(1346)에 판수찬춘추관(判修撰春秋館), 8월에 판예문(判藝文), 3년(1347)에 판밀직당후관(判密直堂後官), 4년(1348) 4월에 승봉랑 통례문지후(承奉郞 通禮門祗侯), 8월에 통주지사(通州知事)가 되어목민관(牧民官)으로서 경륜(經綸)을 펼치기도 하였다.

충정왕 3년(1351) 12월에 내직(內職)에 들어가 지제고 우정언(知制誥 右正言)이 되었으며, 공민왕 10년(1361) 헌납(獻納)에 임명된 후 특지(特旨)로 봉선대부 중서사인 지제고(奉善大夫 中書舍人 知制誥)가 되었으나 그 당시 권신(權臣)들의 전횡(專橫)을 보다 못해 벼슬을 버리고 은퇴하여 노령(老齡)을 핑계로 삼척의 별업(別業)으로 물러나니, 공민왕은 “공(公)이 동쪽으로 돌아간다”고 하여 ‘동노(東老)’라고 사명(賜名)하며 은총을 베풀었다.

그 뒤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예의판서(禮儀判書) 집현전(集賢殿) 제학(提學)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취임하지 아니하니 공민왕은 칙명(勅命)으로 삼척(三陟) 죽서루(竹西樓)에 쉬게 하고 식읍(食邑)을 하사(下賜)하며 진주군(眞珠君)에 봉(封)하였다.
또한, 은퇴한 공(公)은 그 후에 삼척 동쪽 해안의 능파대(凌波臺) 서쪽에 정자 “해암정(海巖亭)”을 지어 후학(後學)을 양성(養成)하며, 노년을 보내면서 시(詩)를 읊고 회포를 푸니 사람들이 “동해상(東海上)의 선옹(仙翁)”이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공(公)의 유훈(遺訓)에 따라 삼척으로 창본(創本)하여 후손들이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으니 삼척심씨(三陟沈氏)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의하면, 진주(眞珠)로서 우리 성씨의 본관을 삼았고 그 인물편에는 첫머리에 심동로(沈東老)를 쓰면서 “시문(時文)으로서 세상에 이름 났었다”라고 말하였다.
또,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은 공(公)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이색은 학사승지(學士承旨)를 제수 받았을 때 “심동로는 저보다 나이도 많고 학식도 높으며, 저보다 먼저 벼슬길에 올랐으니 저의 직책을 그에게 내려 주십시요”라며 사양했다고 한다.
삼척부에 오는 수령이나 선비들은 반드시 공(公)을 찾아 국사를 논하고 시를 지으며, 함께 어울렸다고 한다. 안찰사(按察使)로 온 김구용(金九容:1338∼1384)은 공의 집을 찾아 그의 호인 “信齋”를 쓴 편액을 걸었다. 예빈시(禮賓寺) 이구(李球)는 공(公)을 두고 “관동(關東)의 군자(君子)는 심동로와 최복하(崔卜河) 두 사람(關東二君) 이다.”라고 평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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